청계산. 나는 이 산이 참 좋다. 산이 그다지 높고 웅장한 것도 아니고 계곡이 깊어 빼어난 절경을 품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청계산에 들 때마다 어머니 품같이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 청계산에 다녀오면 어머니를 찾아 고향에 다녀온 듯하다. 그래서일까. 어깨를 짓누르는 세상일을 여기서는 쉽게 내려놓을 수 있다. 가까이에 이런 산을 두고 있는 것은 큰 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뿐이 아니다. 나무와 숲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그 생명의 신비를 느끼기에 이만한 곳이 많지 않다고 생각된다. 경치가 빼어난 산에서는 나무를 멀리 두고 보게 마련이고 오르기 험한 산에서는 주위의 나무를 가까이할 여유가 안 나게 마련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겨울나무사랑’이라는 동호회에서는 주기적으로 청계산을 찾는다. 목표는 매봉이나 망경봉과 같은 산의 꼭대기가 아니라 그냥 청계산 숲이다. 우리는 느긋한 산행을 한다. 그래서 이 산행의 이름은 ‘청계산 숲 산책’이다. 청계산 산행로 중에서도 가장 편안하고 호젓한 숲길을 택하였다. 코스는 관현사 입구 쪽에서 길마재를 넘어 원터골. 가끔은 산행길을 반대로 하기도 한다. 보통 일반인들이 2시간 채 안 걸리는 산행길이 우리에게는 대여섯 시간이 소요된다. 그 대신 그만큼 여유롭다.

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 땀 뻘뻘 흘리며 오직 앞만 보고 등산할 때에는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이 느긋한 산행을 통하여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듣게 된다. 우리는 천천히 걸으면서 산행길 주변의 나무와 숲에 마음을 기울인다. 숲길을 걷다가 나무에 새잎이 움트고 있으면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가 살펴본다. 겨울눈(冬芽)의 인편을 젖히고 피어나는 속잎들! 겨우내 혹한의 추위를 겨울눈 안에서 견디고 솟아나는 아기 잎들을 보면 대견하기 그지없다. 그 나무가 느릅나무이면 일행 중의 누군가 「머언산 청운사/낡은 기와집/산은 자화산/봄눈 녹으면/느릅나무/속잎 피어나는 열두구비를/청노루/맑은 눈에/도는/구름」하며, 박목월 시인의 시를 읊조리기도 한다.

모든 나무들이 햇빛 잘 들고 기름진 터를 잡는 것은 아니다. 안쓰러울 정도로 척박한 곳에 뿌리를 내린 나무나 풀을 보면 걸음이 멈춰질 수밖에 없다. 팥배나무는 돌 틈에서도 굵은 줄기를 내어 씩씩하게 자라고 있고 매화발발도리와 산괴불주머니는 아예 바위 위에서도 불평없이 제 모습으로 자란다. 우리는 돌에 엉켜서 덧난 나무의 줄기를 어루만진다. 그리고 바위에 얄팍하게 쌓인 흙에 혹은 바위틈 사이로 내렸을 뿌리의 기특함을 칭송해 본다.

우리의 산책길을 더욱 더디게 하는 것은 역시 나무마다 피어나는 꽃이다. 이른 봄부터 노란 생강나무 꽃, 분홍의 진달래 꽃, 하얀 돌배나무와 야광나무의 꽃, 연분홍의 철쭉 꽃이 차례로 피어난다. 나무에 따라서 우아하게, 화려하게 혹은 수수하게 제 아름다움을 꽃으로 뽐낸다. 꽃의 향기를 맡아 보기도 하고 꽃잎이 몇 장인지 혹은 꽃술이 몇 개인지 세어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 꽃을 찾아 온 벌, 나비가 꽃가루와 꿀을 채취하는 모습을 보며 한참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나무도 병이 들고 죽어가는, 엄연한 생명의 순리를 지켜보아야 하기도 한다. 오십년은 족히 살았음직한 우람하게 자란 갈참나무는 줄기 껍질이 일부 벗겨진 채 속이 파여 썩어 간다. 아마 꽤 오래전에 생긴 상처가 곰팡이에 감염되어 그런 듯이 보였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몇 그루의 다릅나무는 왜 그런지 줄기가 세로로 찢겨 있기도 하다. 그 뿐인가. 숲 바닥에서 이미 이끼까지 잔뜩 낀 채 서서히 부패하며 다시 흙으로 변하고 있는 죽은 나무들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밤나무혹벌에 기생당한 밤나무를 보는 것은 더욱 마음이 아프다. 어린 나무거나 큰 나무 가릴 것 없이 그 피해로 가지들이 말라 죽어 간다. 밤나무혹벌이 겨울눈에 알을 낳으면 이 알에서 부화한 애벌레가 밤나무 가지에 혹을 만들어 영양을 빨아먹고 말라 죽게 만든다. 마땅히 묘책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숲에서 손님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간섭할 수 있는 일도 아님을 안다. 나무의 병도 죽음도 결국 숲 생태계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지식에 의지하여 모른 채 할 수밖에 없다.

숲 산책을 하며 가끔은 쉬는 겸해서 나무를 안아보기도 하고 명상을 하기도 한다. 나무의 친한 벗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나무와 대화할 수 있으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나무가 겪은 일을 듣고, 우리의 고민을 털어 놓고! 우리는 나무 옆에 바르게 앉아 눈을 감는다. 호흡을 지켜보기도 하고 개울물 소리, 새소리, 나뭇가지에 이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여 보기도 한다.

나무를 살피고 숲을 느끼면서 천천히 산책하다보면 어느덧 대여섯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아무 생각없이 무작정 등산을 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나무와 숲에 마음을 기울이면 보이게 된다. 느긋하게 마음을 기울여 보아야 느린 것의 속도를 느끼게 된다. 새 잎이 돋는가 싶더니 어느덧 숲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는가 싶었는데 벌써 어린 열매가 달린다. 그러한 변화 속에 생명의 신비, 자연의 경이로움이 들어있다. 격주마다 이어지는 청계산 숲 산책이 늘 설레임으로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현익화
농학박사
농림축산검역본부 농업연구관
(사)한국숲해설가협회 숲해설가
‘겨울나무사랑’(다음카페)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