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수목원에 가면 산림박물관 못미쳐 탁 트인 평지에 늙은 비술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가늘고 여린 연회색 잔가지들이 뭉텅이 뭉텅이 아래로 늘어져 멀리서보면 몸 전체에 여러 개의 분수를 지닌 것 같다. 자잘한 잎들은 반나마 떨어져 우듬지 빼고는 성글고,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회흑색 수피를 따라 오래전 북청 물장수가 퍼부었을 성 싶은 흰 액체가 길게 말라붙어 있다. 아련하고 아득하여 나무는 꿈을 꾸는 것 같다.
나무의 꿈. 나무가 꾸는 꿈은 무엇일까.
떠나보낸 자식들의 무탈과 번영일 수도 있고 맑은 햇빛 듬뿍 마시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딱따구리 옆구리를 쪼아도 벌레들 잎사귀를 갉아도’ ‘가지 끝 열어 어린 새에게 밤하늘’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한 걸음이라도 좋으니 움직여보는 것?
비술나무의 꿈은 어떠할까. 혹시 하늘에 닿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무는 지구상의 어떤 생물보다도 오래 살고 높이 자란다. 그래서 사람들은 옛날부터 나무를 ‘우주목 또는 신목’으로 추앙해왔다. 신의 뜻이 그를 통해 전해지고 인간의 소망 또한 그를 통해 하늘에 닿는, 땅과 하늘의 유일한 매개자 나무. 프랑스 수목학자 자크 브로스(Jacques Brosse)에 따르면 ‘우주의 축인 이 나무의 뿌리는 지하 깊숙이 박혀있고 가지들은 천상에 닿아있었다. 이 나무를 통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고 나무는 구름들을 모아 엄청난 비를 내리게 했다. 곧게 뻗은 나무는 천상과 지하의 심연을 연결해주었고 그로써 우주는 영원히 재생될 수 있었다. 뱀은 나무의 뿌리를 휘감고 있었고....신들도 이 나무에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북유럽신화의 이그드라실(Yggdrasil)이라는 물푸레나무가 그렇고 이집트의 무화과, 북아시아의 전나무,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중국의 부상(扶桑)이 또한 그렇다.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편(海外東經篇)에 나오는 부상은 동쪽바다 해가 뜨는 곳에 사는 거대한 뽕나무인데 높이가 3백리나 되고 둘레가 2백 아름이 넘었다. 태양이 열 개이던 시절 각각은 탕곡(湯谷)에서 목욕을 하고 아홉 개는 부상의 아랫가지에, 한 개는 윗가지에 머무르며 다음날 아침이면 차례대로 세상에 떠오르곤 했다.
광릉의 비술나무 저도 어쩌면 지구의 중심에 뿌리를 내리고 신들의 나라에 우듬지를 뻗는 부질없는 꿈을 꾸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세상엔 부질없는 꿈을 꾸는 이들이 제법 있다.
인어공주 아리엘, 그는 사랑에 목숨을 걸었다. 말을 잃는 대신 인간의 다리를 얻었지만 얼어붙은 목소리는 끝내 왕자의 입맞춤을 부르지 못했다. 육지로 나온 지 사흘째 되던 날 해가 서산을 넘어가자 아리엘은 결국 한 줄기 물거품으로 변해 허공으로 사라진다. 개츠비는 또 어떻고. 다른 남자의 부인이 된 여인 데이지에 대한 사랑 하나로 캄캄한 삶을 밝혀온 남자 개츠비. 그런데 개츠비의 차를 몰던 데이지가 사람을 치어 죽게 만드는 사고를 내자 개츠비는 자신이 그 차를 몬 것으로 꾸미고 둘은 야반도주를 계획한다. 하지만 날이 밝도록 데이지는 나타나지 않고 새벽녘 개츠비는, 사망한 여인의 남편이 쏜 총에 맞아 생을 마감한다.
멀리 비술나무 줄기를 따라 길게 말라붙은 흰 빛은 불발로 끝난 그의 꿈같다. 도감을 뒤져 비술나무를 찾는다. 느릅나무과. 낙엽교목. 잎은 어긋나기이며 피침형 타원상 난형. 겹톱니. 취산꽃차례. 수술은 4~5개이며 암술대는 2갈래로 갈라지고 백색 털이 밀생. 열매는 시과(翅果).
이것으로 그런데 무엇을 알 수 있을까. 한 존재의 꿈, 비애를 읽어낼 수 있을까. 주민증과 학력, 직업, 등기부 등본으로는 또 무엇을 알 수 있을까. 함께 살아가는, 혹은 이미 생을 마감한 자들의 애절함과 그리움, 치열함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보스포루스에 갈 거다.
아이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고 복권에 당첨돼 시골에 마당 딸린 집을 사고 산야초 마구 뜯어먹어 불로장생하는 것이 내 꿈이라고 하자, 석 달째 쉬는 날 없이 일한 피로한 그는 그렇게 말했다.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너비 3킬로미터 좁은 해협, 그 바다를 사이에 두고 동양과 서양이 마주 보는 곳, 보스포루스(Bosphorus). 거긴 왜? 술탄이 마시던 예멘산 커피를 마시러. 언제 갈 건데? 시간되고 돈 되고 좋은 사람 생기면.
그러면서 그는 자판기에서 뽑은 사백 원짜리 인스턴트커피를 호루룩 소리 내어 마셨다. 가을 햇빛 반짝 들어선 가난한 그의 눈에서 소행성들이 빠른 속도로 어딘가를 향해 날아갔다. 아마도 보스포루스로. 어쩐지 그는 술탄의 커피를 마시기보다는 울려고, 동양에서 서양을 바라보며 목 놓아 울려고 거기에 가려는 것 같았다.
시월의 수목원 한 귀퉁이는 고요하다. 바람이 휘젓고 간 상수리나무에서 싸르르르, 하고 몽돌 사이로 바닷물 빠져나가는 소리가 난다. 밀잠자리는 햇살 등에 지고 제 자리서 정지비행을 하고 달뿌리풀에 반쯤 가린 왜가리는 물고기는 잡을 생각을 않고 긴 모가지만 두리번거린다. 그깟 인어 한 마리가 ‘인어공주’로 사랑받고 사내 개츠비가 ‘위대한’ 개츠비로 기억되는 것은 왜냐고 묻는 것 같다. 그건 아마 인어와 개츠비가 꾼 부질없는 꿈 때문일 것이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는 늙은 나무 한 그루가 꾼 어이없는 꿈 때문일 것이다. 꿈이 그들을 아름답게 했다.
그런데 그 ‘부질없는’ 꿈을 꾸는 것은 정말 인어와 개츠비와 비술나무일까. 어느 가을 광릉의 늙은 나무 한 그루와 마주선 당신과 나, 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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