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근심을 조금 품고 청계산을 갔던가보다. 멀리서 보는 청계산은 꼭대기만 조금 누르스름할 뿐 여전히 푸르다. 단풍 들지 않아 오히려 안심이 되다니 나도 좀 웃긴다.
등산로 가장자리에 여름 한 철 본 적 없는 새로운 꽃. 보랏빛 꽃과 술이 더러 삐져나오기도 했지만 아직은 입 앙다문 연두빛 꽃이삭이 대부분인 꽃향유다. 오동통 살이 오른 봄날의 애벌레 같다. 솔잎과 산초, 깻잎냄새가 섞인 신선한 향이 난다. 꽃을 따 말려 겨우내 방에 걸어놓아도 좋고 꽃차를 만들어도 좋단다.
늙은 갈참나무를 지나는데 머리 위 허공에서 늦털매미 울음소리. 부슬비처럼 아련하게 흩어져 내린다. 늦털매미 수컷은 높은 나무에서 울기 때문에 소리가 꼭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다. 고운 소리는 좋지만 한여름을 달궜던 참매미며 말매미의 생은 끝났다고 생각하자 조금 심란.
투둑 탁탁 투두둑. 숲에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인적 없는 숲에서 듣는 도토리 소리는 고요한 숲을 더 고요하게 한다. 가만 앉아 그 소리 오래 듣고 싶은데 요놈의 가을 모기가 극성도 보통 극성이 아니다. 하도 달라붙어 김밥 한 조각 제대로 먹을 수가 없다.
비오톱 연못을 지나 계수나무 부근 열 개의 그루터기까지 가는 동안 이러한 것들을 따거나 혹은 주웠다. 흰색 고마리꽃, 분홍빛 개여뀌, 며느리배꼽 파란 열매, 보랏빛 좀작살과 붉디붉은 낙상홍 열매, 산초잎과 꽃향유, 이삭여뀌 꽃대, 큰나무수국 흰 꽃, 수크령 이삭, 진고동 알밤, 아직 푸른 갈참나무 도토리, 노랗게 물든 계수나무 이파리. 그루터기 옆에 쭈그리고 앉아 혼자 소꿉놀이를 했다. 북실북실한 상수리 깍정이와 윤기 나는 갈참나무 이파리를 접시 삼아 방금 주워온 열매와 꽃들로 가을 밥상을 차렸다. 알록달록 꽃밥상이다. 예쁘다. 좋다. 머리 위를 알짱거리는 고추좀잠자리 한 놈을 잡아 밥상에 앉히려다 실패.
이 고운 밥상을 누구에게 줄까. 아들? 남편? 아니면 나? 어느 쪽도 마뜩찮다. 그러다 문득 친정엄마 생각.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꽃으로 밥상을 차려주면 엄마는 엄청 좋아할 것이다. 요양원에서 일하는 옆집 아줌마가 그러는데 새벽마다 요양원 어느 팔순 할머니가 엄마....엄마.....하고 잠꼬대를 하신단다. 엄마는 참, 언제나 내가 아프게 하는 사람이고 또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다.
산 밖에서 산을 볼 적에는 산꼭대기만 노르스름하고, 참나무며 밤나무며 나뭇잎이 여전하여 아직 가을이 멀었거니 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병꽃나무며 백당이며 작은키나무들은 잎이 많이 떨어져 잔가지 사이로 숲 안이 들여다보인다. 풀도 삐쳐 가버리기라도 한 듯 눈앞은 문득 휑하다. 숲이 조금씩 비어간다.
은행나무 다리 건너기 전 오른편 계곡으로 오래된 버드나무.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 나오는 오누이가 호랑이를 피해 우물가로 도망쳐서 잡고 올라간 나무가 이 나무란다. 소나무라는 설도 있지만 우물가 혹은 샘가 옆이라는 걸 보면 물을 좋아하는 버드나무라는 설이 그럴 듯하다. 오누이가 해가 되고 달이 된 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그 책은 어쩐지 쓸쓸한데 그건 아마 엄마가 결국 호랑이에게 잡아먹혔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차라리 한 입에 잡아먹혔으면 모를까 떡은 떡대로 다 뺏기고 골짜기는 골짜기대로 몇 개나 넘고 그러다 결국 팔도 떼어주고 고생고생 하다 그리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왼쪽 어두운 계곡에 연보랏빛 개미취. 고작 꽃 몇 송이에 그 일대 숲이 다 환하다. 저 계곡을 건너가보리라 다짐했건만 올해는 말벌과 뱀이 무서워 못갔다. 겨울에나 들어가 보려나. 들어가면 그저 서성이지는 않을까.
산사나무는 이 계절이면 선혈이 낭자한 듯 붉은 열매가 가득인데 이곳 산사는 푸른 잎뿐이다. 열매가 없으니 기품 있는 자태가 오히려 안쓰럽다. 혹 줄기 밑동을 감싼 돌멩이들 때문은 아닐까.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데 병꽃나무와 사위질빵, 환삼덩굴 사이로 으리으리 삐까번쩍 세 겹 짜리 황금빛 거미줄. 무당거미다. 암컷 무당거미는 배가 진짜 남산만 하다. 산란을 앞두고 있나보다.
ㄴ자로 굽은 밤나무를 지나다 이유 없이 뒤돌아 본 밤나무 옆으로 이러저런 덩굴에 아랫도리가 가린 까맣게 탄 갈참나무. 덩치는 밤나무보다 약간 크다. 그렇게 다니고도 이제사 본다. 밤나무가 ㄴ자로 심하게 굽은 이유를 모르겠다 했더니 아마 왕성하게 자라는 갈참의 기세에 눌려 계곡 쪽으로 다른 줄기를 내다 어떤 이유에선지 갈참 쪽 줄기는 완전히 떨어져나가고 아예 계곡 쪽 줄기로만 자라게 되었던가 보다. 쫓겨간 밤나무는 굽어서도 싱싱하고 쫓아낸 갈참은 숨이 다했다. 애증, 이라는 말은 이 둘 사이에 어울릴 것이다. 숨이 멎은 갈참을 보는 일이 밤나무도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밤나무에겐 귀찮은 일인지 몰라도 ㄴ의 아래획 부분에는 별의별 것들이 다 둥지를 틀었다. 밤이면 서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것이다.
숲길여행 모임장소 아래 계곡은 온통 물봉선 천지. 덜 여문 씨앗도 많지만 어떤 녀석은 손을 가져다대면 타앙, 총알 나가듯 꼬투리가 터지며 사방으로 날아간다. 재밌어 자꾸 하게 된다. 늦은 오후의 가을 햇살이 비껴든 물봉선밭은 보랏빛 물결이 이는 듯 아른아른하다. 나도 석양인 것처럼, 물봉선밭 한 옆에 쭈그리고 앉아 한쪽으로 머리 비스듬히 기울이고 꽃들과 눈 맞춰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