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31일 마지막날, 청계산에 갔다. 왜 마지막 날에 갔냐하면, 그냥 그래야할 것 같았다. 여기는 새벽에 잠깐 눈이 왔던가보다. 바닥에 종이처럼 얇고 성긴 눈. 숲 바닥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대지는 차고 딱딱하다. 동토(凍土), 라는 말이 실감난다. 오래 알아온 다정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차갑게 변해버린 것처럼 섭섭하기까지 하다.
비오톱 가기 전 오른쪽으로 주목 몇 그루. 그간 별로 관심 갖지 않았는데 푸른빛이 귀한 철이라 발길이 저절로 그리로 간다. 성북동 간송미술관에도 주목이 있다. 그런데 그곳 주목 안에는 닭들이 산다. 방사상으로 뻗은 주목 가지 하나씩을 횃대 삼았다. 생김새며 걷는 모습이 고고하다. 미술관에 살다보면 보통 닭들도 그리 되는 것인지 아니면 보통 닭이 아니어서 미술관에 사는 지는 잘 모르겠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주목 중 두 그루가 그런데 좀 이상하다. 나란히 선 두 그루 중 한 그루가 다른 나무 사이로 가지 하나를 뻗었다. 뻗은 가지는 다른 가지에 닿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성인 팔뚝만한 것 두 개가 합쳐졌으니 내 생각엔, 합쳐진 부분이 두 배쯤 된다든가 아니면 최소한 뭉툭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칼로 잘라 갖다 붙인 듯 감쪽같다. 이유가 있을 것인데 잘 모르겠다. 다만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의 연인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 그리고 그녀의 1900년 작품 ‘애원’을 떠올릴 뿐.
로댕과의 불같고 꿈같은 사랑이 끝난 후 까미유는 ‘중년’, ‘애원’, ‘왈츠’ 등을 제작한다. 작품 ‘애원’은 젊은 여인이 뭔가를 향해 혹은 누군가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가지말라고 간절히 애원하는 형상이다. 아마 로댕에 대한, 떠나가는 사랑에 대한 애원일 것이라고 후세 사람들은 추측한다. 그녀는 푸른 주목 가지처럼, 그냥 로댕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었던 걸까. 흔적도 없이 다른 존재가 되고 싶었던 걸까. 로댕과 헤어진 후 까미유는 가난과 피해망상, 로댕에 대한 애증을 삭이지 못하고 결국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곳에서 30년의 세월을 보낸 후 혹한이 지속되던 어느 날 병원 침대에서 동사(凍死)한 채 발견된다.
은행나무 다리를 건넌다. 신록처럼 가득하던 11월의 새 소리는 한 달 만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상수리 마른 잎도 사라졌다. 으름 푸른빛도 사라졌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야만 우듬지가 보이는 고욤나무 세 그루 맞은편으로 한 아름이 넘는 갈참나무 한 그루. 단순하고 명료하다. 깊은 숨을 토하고 그대로 정지해버린 것 같다. 생의 남루(襤褸)와 비루(鄙陋)는 이제 그의 것이 아닌가보다. 사랑하게 되었다, 많은 나무들 중 그를.
계곡 쪽 은사시나무는 은사시, 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져다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늙어버렸다. 곁을 스치기만 해도 나무의 노쇠한 한숨이 들리는 듯하다. 한때 은사시는 씨앗의 갓털이 알레르기를 일으킨다고 하여 대량으로 잘려나갔다. 은사시 나무는 속성으로 크게 빨리 자라는 나무다. 하지만 은사시라는 이름만은 여리고 자잘하여, 마음에 두면 어느 새 눈앞에 은빛 잔물결이 인다. 은빛과 관련된 것들 그러니까 은비령, 은어, 은어낚시, 은백양, 은파, 은하수, 은꿩, 은잠 같은 것들은 반짝이고 흔들리고 그리고, 사라진다. 금과는 느낌이 다르다. 산본 어디에 가면 은사시나무숲이 있다. 얼마 전 몹시 추울 적에 갔다 왔다. 봄이 되면 다시 갈 건데 그 숲에 봄이 올 것을 생각하자 왜 자꾸 한숨이 나는지 모르겠다. ‘용필이 오빠’ 노래처럼.
산오리나무 옆 벤치에 앉았는데 호드득 새소리. 급히 땅콩하고 호두 몇 알 꺼내 잘게 부숴 벤치에 늘어놓는다. 곤줄박이가 제일 먼저 날아온다. 이어 동고비가 날아오고 마지막으로 박새와 쇠박새가 날아왔는데 박새는 도대체 몇 번이나 호두 바로 앞까지 날아왔다가는 끼이익, 급 유턴해서 다시 날아간다. 간신히 한 마리, 초긴장하여 다가왔는데 가루와 다름없는 부스러기만 부리에 묻히고 또 급히 달아난다. 그새 곤줄박이며 동고비는 수시로 날아오고 한 무더기였던 땅콩과 호두는 금세 바닥나버렸다. 이제 박새는 용기를 내어도 더 먹을 것이 없고, 나도 커피 말고는 줄 것이 없다.
산을 내려오는 데 뭐가 자꾸 뒤를 따라오는 느낌. 한 줌도 안되는 작은 손으로 내 옷 자락을 붙잡고 타닥타닥 나를 따라걷던 기억 속의 내 어린 것 같기도 하고 한 해의 마지막달 마지막날 같기도 하고 배고픈 박새 같기도 하고. 아니면 푸른 주목 그늘, 그 안에 든 까미유일까. 스승이자 스물넷 연상의 연인이었던 로댕은 열아홉 까미유에게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감동하기, 사랑하기, 소망하기, 걱정하기, 살아있기이다. 예술가가 되기 전에 먼저 뜨거운 가슴을 가져라.”
감동하고 사랑하고 소망하고 걱정하였으나 사랑이 지나쳐 ‘온전히’ 살아있기에는 실패한 여자, 은사시 이파리 같이 반짝이고 흔들리다 어느 날 사라진 여자. 그게 우리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살다보면 인생에 그렇게 다른 존재 속으로 와락 숨어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지 않던가. 사랑이건 집착이건 고단함 때문이건.
숲을 지나는 바람이 날카롭다. 얼굴이 시리다. 내일 아침 그러니까 2015년 아침은 영하 10도란다. 땅은 더 얼어붙을 것이고 나무는 더 움츠리며 새는 또 더 배고플 것이다. 잘 견뎌서 봄이 올 적에는 늙은 은사시도, 겁 많은 박새도, 푸른 주목 그늘도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다.
청계산을 나와 2차선 도로 흙길에 서서 버스가 오는 쪽을 바라보는데 나는 꼭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건 아닌 것 같다. 바람은 여기도 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