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짓는 일과는 평생 인연이 없을 줄로 알았는데 어느 날, 북한산 산자락 그늘에 들어 당신의 옷을 짓게 되었다. 비단과 삼베로 지었다. 발이 고운 삼베로는 단속곳과 속적삼을 지었다. 버선 안감도 지었다. 짓다가 혼자 웃었다. 발볼이 넓고 퉁퉁하여 버선을 신고 벗을 적에 이리 뒤뚱 저리 뒤뚱 낑낑대던 당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추 삼베는 마감하고 이번엔 흰 색 비단 한 필을 폈다. 손으로 어루만질 적에 사각사각 또는 아삭아삭 소리가 났다. 누에 한 마리가 그 안에 들어 푸른 뽕잎을 갉아먹는가 싶었다. 손에 닿는 비단은 곱디 고와 새삼 늙고 추레한 당신의 몸이 떠올랐다. 속으로 좀 놀랐다. 당신의 늙은 몸에 놀랐다는 건지 고운 비단에 놀랐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비단으로는 속저고리를 지었다. 섶의 뾰족하니 작고 부드러운 코가 앙증맞고 좋았다. 그런데 당신에게도 그렇게 뾰족하며 작고 부드러운 것이 있다는 걸 당신은 아는지. 그러니까 당신의 몸이 아직 젊고 탄력 있을 적, 당신도 열정과 욕망으로 밤마다 남자를 사랑하던 적 로맨틱한 당신의 남자는 최신 펜탁스 카메라에 당신을 담았다. 사진 속 당신은 인적 드문 계곡 볕 잘 드는 바위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망측하게도, 홀라당 옷을 벗고 두 가슴은 드러냈는데 격자무늬 양산 아래 작은 젖꼭지 두 개가 꼭 섶의 뾰족하니 돌아간 코처럼 매혹적이고 섹시했던 것이다. 당신은 그런데 그 사진의 행방을 모를 것이다. 어느 명절 당신의 집에 갔다가 내가 몰래 훔쳐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으니까.
배가 고파 시계를 보니 벌써 정오. 밥 지어먹기도, 나가 사먹기도 귀찮아 라면을 끓였다. 찬밥 두 숟갈을 말아 국물까지 먹었다. 어느 해 내 생일, 일곱이나 여덟쯤 되었을까, 오랜만에 기름진 것을 먹고 이른 저녁잠이 든 나를 당신은 굳이 깨워 무슨 급한 일이라도 되는 듯 억지로 라면 한 줄기를 먹였다. 어린 것의 명(命)이 문득 걱정되었을 것이다. 살아가는 일의 위태로움과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때가 인생에 몇 번 있다. 아이를 키워보니 그렇다.
청회색 비단 치마와 노랑 저고리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 있어 건너뛰고 마지막으로 원삼을 지었다. 연분홍 길에 흰 색 깃, 색동으로 소매를 하고 소매 끝에는 흰 색 한삼을 대었다. 당신이 결혼식에 입었던 옷이다. 나비 날개 같이 곱다. 화려하다. 곱고 화려해서 그만 심란해진다. 산책을 나섰다.
겨울 북한산 산자락은 무채색이다. 멀리 능선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어깨며 허리며 그제사 아파와 에구 에구 하며 걷는데 개암나무 잔가지에 푸른 보석이 대롱대롱. 텅 빈 겨울산에 저 혼자 푸르다. 유리산누에나방 고치다. 흔들어보니 안에서 달그락 달그락 허물 부딪는 소리가 난다. 지난 가을 이미 나방이 되어 날아갔을 것이다.
오랜 시간 벌레, 라고 불리던 그는 삶의 최전성기에 문득 고치를 짓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죽은 듯 칩거하다 어느 날 고치를 뚫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개가 돋아있었다. 날개를 단 그는 이제 더는 꿈틀거리지 않고, 더는 허겁지겁 적을 피해 차고 습한 지하로 숨어들지 않았다. 스스로 입을 꿰매 먹는 일에 연연하지 않았다. 물 한 모금도 탐하지 않았다. 먹을 것에 목을 매지 않게 되자 사랑이 보였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을 살게 되었다. 다른 존재가 되었다.
숲을 다니면서부터 조금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발 딛고 선 지금의 시간과 공간에 또 다른 낯선 시간과 공간들이 겹겹의 꽃잎처럼 포개져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러한 시간과 공간은 아주 사소한 것들 그러니까 실베짱이의 가늘고 여린 더듬이를 통해 오거나 밑들이메뚜기의 힘찬 뒷다리를 통해 오거나 또는 늙은 당단풍 가느다란 잔가지가 어지럼증인 듯 아닌 듯 허공에서 휘청 흔들리는 순간을 통해 온다는 생각. 그 낯선 시공간의 문짝에 귀를 기울이면 문 안쪽에서는 또 이런 소리도 들리는데 이를테면 축축한 낙엽 아래 먼지벌레 다다다다 기어가는 소리, 무언가에 놀란 장지뱀이 화들짝 비늘을 곤두세우는 소리, 고치 안에서 생을 마감한 푸른저녁나비 애벌레의 굳어가는 숨소리, 어미를 보지 못하고 겨울잠에 든 무당거미 어린 것이 잠결에 희미하게 흐느끼는 소리 등등. 환청 내지는 뻥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격자무늬 우산도, 최신 카메라를 둘러맨 애인도, 어린 젖먹이도 없이, 홀라당 윗도리를 벗어젖히지는 더욱 못하고 북한산 산자락 찬 바위에 엉덩이 한쪽을 걸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로 한다. 어느새 눈앞으로, 어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해류(海流) 같은 것이 흘러왔다 흘러간다. 겹겹의 시간과 공간은 그러면 각각 자신이 품은 것들을 데리고 그 해류에 올라타 숲 밖으로 흘러나가기도 하고 숲 안으로 흘러들어오기도 하는 데 그중에는 막 고치에서 날아오른 유리산누에나방도 있다. 동그란 유리창 두 개가 난 곱고 아름다운 날개를 달았다. 그 못지않게 아름다운 비단옷을 입고, 당신도 언젠가 그 물결에 올라탈까.
찬바람 한 움큼 새 둥지처럼 머리칼에 들이고 다시 작업실로 왔다. 심란하던 것이 많이 풀려 이제 당신이 베고 누울 베개 하나만 뚝딱 만들고 집에 가기로 한다. 흰 색 비단을 썼다. 마우스패드만한 크기에, 마우스패드만한 두께로 솜을 두었다. 소꿉질 같다. 가장자리 양쪽에는 프릴을 달았다. 프릴은, 먼 바다에서부터 오는 잔물결을 닮았다.
머지않아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은 먼데서부터 인 잔물결이 되어, 그 물결이 다음 물결을 일으키고 다음 물결이 다시 그 다음 물결을 일으키는 식으로 내 발목에 와 닿으면 좋겠는데 글쎄, 그렇게 먼데서부터 오는 당신을 발목에서 느끼려면 나는 아직은 더 좌절하고 미워하고 징징 짜야하리. ‘당신이 내 발목을 간질이는’ 일은 아무래도 당신의 몫이 아니라 내 몫일 터이니.
종일토록 산자락 그늘에 들어 옷을 짓다보니 내가 지은 것이 당신의 옷인지 나의 옷인지도 몰라져버렸다. 아무튼 사람들은 그 옷을 수의(壽衣), 라고 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