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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따라 달려라
 
장수정 기자 기사입력  2018/02/25 [20:59]

▲     © 사진 장하윤

대체로 무미하고 건조한 삶이 이어지던 중 문득 자유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 것은 산속을 헤매는 그를 보고부터였다. 그는 산에 버려진 그의 어미와 역시 산에 버려진 그의 아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발견되었을 때는 갓 태어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태였다. 토굴이라 하기에도 어려운 바위 아래 제 오라비와 몸을 맞대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는데 오라비는 무슨 연유로 다리 한 쪽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부모의 행방은 묘연했다. 오누이를 버리고 간 건지 사고를 당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라비는 버려두기로 하고 그 혼자 구조되어 이곳 산속 부대로 왔다. 오라비는 얼마 안가 죽었다.

산속에 위치한 이곳 부대에 와서는 많이 사랑을 받았다. 저가 살던 곳과 같은 산이긴 하지만 사람이 지은 시설이라 혹독한 추위도 산짐승들로부터의 위협도 피할 수 있었다. 세 끼 거르지 않아서 좋았다. 사람이 주는 음식 말고도 산에 사는 들쥐며 새도 잡아먹었다. 때로 고라니의 목을 물어 산길 한 가운데 팽개쳐놓았다. 산길에 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기겁을 하는 것을, 멀찍이 떨어진 높은 곳에서 지켜보는 것은 한편으로 재미있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자유롭게 산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철따라 진달래며 복사꽃을 보고, 으름과 다래열매를 먹고, 바람을 따라 달렸다. 산양처럼 가뿐하게 의기양양하게 가파른 사면을 뛰어다니고, 빠르게 사면을 훑는 거대한 구름의 그림자와 경주라도 하듯 열렬히 달음박질을 했다. 두껍게 쌓인 갈참나무 낙엽을 헤치고 그 아래 부엽토의 그윽한 냄새를 맡는 일은 그중 가장 좋았다. 그 검고 축축한 냄새를 맡고 있으면 나무와, 지난여름 바람에 까불리던 나뭇잎 하나하나의 푸른 노래가, 수명을 다하고 흙으로 돌아가 이제는 평화가 되어버린 무수한 육신이, 어쩌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어미 아비가 단박에 그의 몸으로 스며들며 부드럽게 그를 감싸는 것 같았다. 가끔 산 속 어디에서 녹슨 청동 파이프를 지나온 것 같은 청딱따구리 울음이 들릴 때에는 그 울음에 밴 비릿한 쇠 냄새에 이유 없이 슬퍼지기도 했다.

부대 사람들은 그가 종일 밖을 쏘다니다 와도 누구 하나 싫은 소리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그보다 먼저 이곳에 들어와 살고 있던 늙은 수컷이었는데 그것 역시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이곳으로 와 이제는 그의 할아버지뻘이 되어서는 희미하게 그에게 치근대곤 했다. 아직 생리도 시작하지 않은 어린 그에게 그 늙은 수컷의 존재는 가당치도 않았다. 그래도 늙은 것의 성정이 허술하여 스스로 생각해도 못됐다 싶을 만큼 앙탈을 부리면 그대로 물러서, 성가시기는 해도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날이 성장해 어느덧 아가씨가 되었다. 산 아래 마을에 내려갔다가 어귀에서 수컷을 만났다. 아름다웠다. 피부가 갈색인 그와는 달리 온 몸이 눈이 내린 듯 희었다. 몸이 근질근질하며 눈은 물기로 번득이고 몸에서는 저도 민망할 만큼 근지러운 교태가 흘러나왔다. 그길로 사랑을 했다. 이후로는 틈만 나면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갔다. 이듬해 봄 새끼 셋을 낳았다. 아비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부대 안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늙은 수컷이 나이를 먹기는 했어도 용모는 여전히 아름답고 품위가 있어 그를 아비라고 지목하는 이도 있었고, 산 아래 마을에서 그가 젊은 수컷과 흘레붙는 것을 목격했다는 이도 있었다. 어쨌건 새끼를 낳고나서 내리 사흘 산 아래 수컷이 부대 주변을 맴돌았으나 그럴 때마다 늙은 수컷이, 내가 아는 한 그것은 한 번도 무언가를 향해 짖은 적이 없는데, 컹컹 위협적으로 짖어대는 바람에 어느 날부터 젊은 수컷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게 되었다. 이후로는 늙은 수컷은 어린 것들을 제 새끼인 양 돌봤다. 산길을 걷다보면 늙은 수컷을 선두로, 까불대며 철없는 어린 것들이 따르고 그로부터 한참을 떨어져 산그늘처럼 고요히 그가 뒤를 따랐다. 이 가족은 산길을 걷다가 사람을 만나면 험하게 위협을 하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방정떨며 기어올라 애정을 구하거나 비굴하게 먹을 것을 구하지 않았다. 등산객들로 산길이 북적일 때면 저희가 먼저 길 가장자리에 멈추어 길 한가운데를 내어주었다. 사람에 대한 예의와 신뢰가 남달랐다.

새까만 젖꼭지를 한겨울 고욤처럼 주렁주렁 매단 그는 아가씨 때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뭐랄까 어미로서의 책임과 각오가 몸에 배어 전에 없던 품위가 그에게서 풍겨났다. 그러면서도 틈나는 대로 홀로 산중턱을 배회하며 낙엽을 헤치고 흙냄새를 맡았다. 70도는 족히 되어 보이는 가파른 경사면을 갈지자(之)로 성큼 올라 빠르게 능선을 넘어 사라질 때는 혹 저가 태어난 토굴을 찾아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새끼들과 느릿느릿 걸을 때의 그도 아름다웠지만 산을 탈 때는 더욱 늠름하고 아름다워 마치 자유뿐만이 아니라 어떤 고독이, 자유의 그림자로서의 절대 고독이 그의 등에 올라타 그를 채찍질하여 그로 하여금 날래게 능선을 넘어가게 하는 것 같았다.

새끼들이 부쩍부쩍 커가면서 고욤을 닮은 그의 치렁한 젖꼭지도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산 아래 마을을 다녀오는 일이 잦아졌다. 부대 안에서는 말이 돌았다. 또 다시 새끼를 배면 어쩔 것이냐, 더 민망하게는 부대 안에서 발정이라도 나 제 새끼와 흘레라도 붙으면 어쩔 것이냐, 부대라는 게 무엇이냐, 수컷들만 모여 있는 곳 아니더냐, 일국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그런 험한 꼴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런 말들이 돌고 나서 나흘인가 후에 다시 그 산길을 찾았다. 산길 초입에서 부대 소속 영양사 여자를 만났다. 첫눈에 심기가 몹시 불편해보였다.

오늘 아침에 데려갔어요. 새끼 둘도 같이.

.........

나는, 그에게 주려고 가져온 빵 봉지만 일없이 만지작거렸다. 그가 자주 올라 다니던 맞은편 산중턱 깊고 어두운 흙냄새가 내게로 훅 건너오는 것 같았다.

▲     ©사진 장하윤

그와 그의 새끼 둘은 지금 보호 센터에 있다. 누군가에게 입양되면 다행이지만 일정기간이 지나도 입양되지 못하면 결국 안락사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를 입양하겠다는 사람은 그런데 쉽게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몸에는 길들여지지 않은 산의 냄새가, 산에서 길어 올린 깊은 자유와 고독의 냄새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짧게 그를 추억하면서 새삼, 산에 개를 버리지 말자든가 산에 개를 버릴 수밖에 없는 사정이 누구에게든 있는 거 아니냐와 같은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누가 좋고 누가 나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물처럼 바람처럼 산을 쏘다녔던, 사랑을 할 줄 알았던 개 한 마리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황구라고 불린 갈색 유기견 얘기를.

 

바람을 따라 달려라 - ‘돼지풀꽃이 필 때면’(Tom McCaughren)에서


기사입력: 2018/02/25 [20:59]  최종편집: ⓒ 서초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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