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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구의 시간
 
장수정 기자 기사입력  2018/09/25 [17:47]

우이령 산 속 군부대에는 흰 개 세 마리가 산다. 처음엔 백구 한 마리에서 시작했다. 원래 산 속에 버려졌던 것인데 부대로 데려와, 저녁 무렵이면 부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멧돼지들을 쫓도록 했다. 큰 힘이 되었다. 다음으로 황구가 왔다. 백구처럼 역시 산속에 버려진, 아직 어린 암컷이었다. 몇 달이 지나자 황구는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했다. 수컷인 백구는 그런 아름다운 황구를 사랑하여 종일 황구 뒤를 쫓아다녔다. 하지만 사람으로 치면 할아버지뻘인 백구를 아가씨인 황구가 좋아할 리 없어 백구가 조금이라도 치근대거나 다정하게 굴라치면 황구는 야멸차다싶을 만큼 사납게 짖어댔다. 언제부턴가는 산 아래 마을로 자주 내려가더니 기어이는 배가 불러 돌아왔다. 곧 새끼를 낳았고 부대에서는 흰 색 수컷 한 마리만 남기고 모두 분양했다. 남은 것은 부대의 이름을 따 공이, 라고 이름 지었다. 어미인 황구가 제 기분 내키면 언제고 새끼를 물리치고 휙 산속을 돌아다니거나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던 것과는 달리 백구는 아비처럼 혹은 아비 이상으로 공이를 돌봤다. 부대에서는 그래서 공이의 아비가 백구라는 소문도 잠시 돌았다. 얼마 후 황구가 두 번째 새끼를 낳았다. 이번에도 아비는 적어도 백구는 아니었다. 부대의 고민이 깊어졌다. 혈기왕성한 사내들뿐인 부대에서, 개들이 벌이는 자유로운 연애행각을 지켜보는 일은 민망했고 또 앞으로 황구가 낳게 될 새끼들을 처리하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결국 수컷 새끼 한 마리만 남기고 이번에는 황구마저 동물보호센터로 보냈다. 졸지에 어미와 떨어진 어린 수컷, 산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을 이번에도 백구는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당연히 어미가 가르쳤어야할 예절과 규율도 함께 가르쳤다. 멧돼지를 보면 몸을 사리지 말고 쫓아갈 것, 탐방객에게는 짖지 말 것, 탐방로에 바퀴달린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나타나면 짖을 것, 위계질서는 반드시 지킬 것 등등. 산이가 가끔 백구의 음식을 탐내거나 철없이 사람에게 짖어대면 백구는 낮게 단 한 번 컹, 하고 짖었다. 그러면 산이는 거짓말처럼 그 즉시 입을 다물었다.

헌신적인 백구의 보살핌과 훈육 아래 공이는 어느 새 의젓한 청년이 되어갔고, 천성이 촐랑대고 개념 없던 산이는 여전히 이유 없이 짖어대기는 해도 전체적으로 무탈하고 활기찬 소년으로 성장해갔다. 셋은 늘 함께, 고요히 우이령길을 다녔다.

▲     © 사진 김태남

평화롭고 확고해만 보이던 그들의 삶에 균열이 생긴 것은  많은 경우 그렇듯이 계집 하나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면서였다. 산 아래 마을에 사는 그 계집은 여름이 막 시작되기 전 슬슬 우이령을 올라와 부대 근처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암컷이 먼저 사내들의 거처를 기웃거리는 것이 나로서는 솔직히 못마땅했다. 그래서인지 미미, 나는 내 멋대로 그것을 미미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좋지는 않았다. 미미는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몸매에 얼굴은 아래가 뾰족하고, 특히 꼬리가 요사스러웠다. 부챗살처럼 생겨가지고 풍성한 아랫부분은 말갈기처럼 갈라져 걸을 때면 물풀처럼 육감적으로 흔들렸다. 구미호 같았다. (그것이 구미호 같다는 나의 생각은 여성에 대한 비하와 불쾌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거라고 주변사람들은 즉시 지적, 교정해주었다.) 미미는 얼마 안있어 흰 개 세 마리에 성공적으로 합류했다. 특히 셋 중 누구의 여자가 되었는가가 명백해졌다. 부대에서 일하는 여자가 보여준 휴대폰 속 사진에서 미미는 백구 바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 옆이 공이, 산이 순이었다. 미미와 백구가 어느 정도까지 깊은 관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미미가 백구의 보호 혹은 비호를 받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백구와 미미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부대는 곧바로 백구의 목에 사슬을 채워 미미로부터 백구를 격리했다. 백주대낮에 부대 마당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둘의 애정행각 그리고 그로 인해 책임져야할 일이 생기는 것을 경계해서였다. 그런데 백구의 목에 쇠사슬이 채워진 것을 기회로 셋 사이의 기존의 탄탄한 위계와 짬밥이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할 것 같던 의젓한 청년 공이가 그만 백구가 묶이자마자 미미와 놀아나기 시작한 것.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것은 이번에도 역시 부대에서 일하는 여자의 휴대폰 속 사진을 통해서였는데 사진 속에서 공이와 미미는 머리 위로 무성한 햇빛을 받으며 숲 가장자리 산초나무 아래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행복해보였다. 영원할 것 같던 짬밥의 질서는 결국 구미호 꼬리를 가진 계집 하나로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

그런데 미미와 공이가 눈앞에서 긴밀한 사이가 된 것을 목격하게 된 백구는 어찌 되었을까. 백구는 눈알이 핑핑 돌며 목에 걸린 사슬을 끊고자 몸부림쳤다. 얼마나 악을 쓰던지 부대 사람들에 따르면 그 비통함이 사람이 부모를 여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사슬이 목을 조여 상처가 났고 그 상처에 한여름 더위가 더해져 곪으며 구더기가 끓는 지경이 되었다. 부대 사람 손에 이끌려 며칠 병원에 통원 치료를 다니고야 상처가 아물게 되었다. 이런 일은, 한여름 무더위가 한 풀 꺾이고 나무 높은 곳에서 늦털매미가 패잔병처럼 쓰읍쓰읍, 하고 울 때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내가 다시 우이령을 찾은 것은 박각시 애벌레들이 손가락만큼 굵어져 곧 가을의 땅 속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달콤한 칡꽃의 향은 기억으로만 남을 즈음이었다. 한가로이 령 초입에 들어섰다가 부대 뒷마당으로 통하는 간이화장실 앞에서 미미를 보게 되었다. 미미는 잔뜩 배가 불러, 오지 않는 누구를 기다리듯 또 한껏 풀이 죽어, 내가 얼결에 저리 가라는 손짓을 하자 일어나 고작 서너 걸음 물러났다가는 다시 바닥에 무거운 배를 대고 엎드렸다.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부대여자에게, 저 아래 미미가 있노라, 애처롭더라 했더니 코웃음을 쳤다. 개 수컷은 암컷이 새끼를 배면 그 후로는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이미 공이는 산 아래 마을의 다른 암컷에게 마음이 가있다고 전했다. 나는 그간 미미를 구미호 같다고 여겼던 것이 조금은 미안해졌다.

그러고는 또 한동안 우이령을 못가다가 늦털매미 울음소리가 한결 드높아지고 작살나무 보랏빛 열매가 꽃인 양 구슬인 양 햇살에 반짝거리는 때가 되어 다시 우이령을 찾았다. 무심히 부대 앞을 지나다 부대 마당에 백구와 공이와 산이가 나란히 엎드려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흰 개 셋은 그간의 어지러운 사연이 무색하도록 평화롭고 나른해보였다. 그동안 부대 여자가 전한 사연이 사실인지, 휴대폰 속의 사진이 백구와 공이는 맞는지 순간 의심이 들 정도였다. 여름에 비하면 한결 부드러워진 햇살, 서늘한 기운이 도는 맑은 바람, 인적이 끊긴 우이령 때문이었을까, 문득 부대 마당에 한가로이 엎드려있는 것은 단지 크고 흰 개 세 마리가 아니라 시간,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간 과거의 백구, 현재의 공이,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성큼 자라는 산이가 서로 얽히고설키며 때로 으르렁거리고 때로 섞여들고 때로 물러나고 때로 전진하며 퇴색하는, 시간이라는 무자비말이다.

지금까지 우이령 고개를 넘어간 것은 그렇다면 사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것, 백구의 사랑에 묻어가고 공이의 배신에 날래게 올라탄 ‘시간’이라는 놈이었을까. 

덧붙이자면 이 글을 쓰고 이틀 후 다시 우이령에 갔을 때 공이가 많이 다쳤노라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참치통조림 두 개를 가지고 부대 여자를 따라 공이를 보러갔다. 공이는 부대건물 복도 끝에 묶여 있었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눈에는 눈곱이 잔뜩 끼고, 며칠 씻지 않은 몸에서는 역한 냄새가 났다. 목에는 상처를 보호하기 위한 엘리자베스 카라를 쓰고 다리는 절룩거리며 무엇보다 고환을 세게 물려 막 수술을 하고 온 후였다. 평소 좋아하던 참치통조림을 따주었지만 식욕이 없는지 반나마 남겼다. 사연인즉슨 어느 저녁 홀로 산 아래 마을에 내려갔다가 그 동네 수컷들에게 집단으로 당했단다. 다음날 아침 부대 사람들에게 발견되었을 때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부대 뒷마당에 쭈그려 끙끙 앓고 있었다고 했다.

 

 


기사입력: 2018/09/25 [17:47]  최종편집: ⓒ 서초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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